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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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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오직 Sola
저자/출판사권기호/엘맨
ISBN9788955150575
크기140*210mm
쪽수140p
제품 구성낱권
출간일2023-04-11
목차 또는 책소개상세설명참조


제 1 강 오직 예수 중심
성 경 : 로마서 14 : 7 – 9 / 마 17 : 1 - 8

세상의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입니다. 검찰과 법원을 표시하는 마크에 보면, 항상 양쪽에 저울이 있습니다. 검찰은 양쪽 저울을 두고, 그 밑에 검찰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양쪽 저울을 두고, 사람이 그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검찰과 법원 둘다 양쪽 저줄에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검찰과 법원이 그 중심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중심을 잃어 버리면, 결국 신앙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볼펜이 있습니다.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곧 바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잡아가면서 집을 건축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붕 스라브를 콘크리트를 칠 때 무게 중심이 한 쪽으로 쏠리면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 역시 신앙 생활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중심입니다. 그래서 2018년 3월 시작하면서 5주 연속으로 신앙중심강좌를 실시합니다. 그럼 우리가 잡아야 신앙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오직 예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신구약성경의 중심이 예수님이고, 우리의 신앙의 중심도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국교회를 대표하셨고, 대학생 선교회 C.C.C.를 설립하고, 한 평생을 젊은이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신 C.C.C.의 김준곤 목사님이 계십니다. 젊은이들이 모인 여름 수련회 특별 강사로 오셨습니다. 젊은이들 앞에서 그리 길지 않는 설교를 마치시기 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질문을 하든지 여러분들은 ‘오직 예수’라고만 대답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함께 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우리의 힘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우리의 지혜는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우리의 능력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우리의 보배는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인류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생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오직 예수! 나는 누구를 위해 삽니까? 오직 예수! 잠을 자도? 오직 예수! 밥을 먹어도? 오직 예수! 공부해도? 오직 예수! 집에 있을 때에도? 오직 예수! 학교에서도? 오직 예수! 매일 매일? 오직 예수! 어디에 있어도? 오직 예수! 무엇을 해도? 오직 예수! 세상 끝까지? 오직 예수! 영원토록? 오직 예수!
이렇게 김준곤 목사님은 그 유명한 ‘백문일답’을 통해서 젊은이들 가슴에 오직 예수를 심어주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집회에 참석할 정도의 열심 있는 젊은이라면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아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질문은 단순히 우리의 지식을 확신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이 없이는 못삽니까?, 당신은 정말 오직 오직 오직 예수입니까? 바로 이것을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젊은이들은 김준곤 목사님의 마음을 깨닫기 시작하자, 모든 젊은이들은 오직 예수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질문이 이어지면서 오직 예수라는 대답대로 살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으로 오직 예수를 외쳤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따라 하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 오직 예수’를 외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농담 비슷하게 따라 하던 젊은이들도 얼마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같은 마음으로 오직 예수를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마태복음 17:1-8을 봅시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5절에 제자들이 말할 때에, 6절에 제자들이 듣고, 8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다고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체험한 자는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12:2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오직 예수님만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1-2에서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예수만 전파해야 합니다. 셋째, 오직 예수님만 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귀가 오직 예수만 들어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소리만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그 다음 로마서 14:7-9을 봅시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첫째,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도 없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절대로 자기 중심으로 살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1:20-21을 봅시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이라” 이 말씀은 첫째,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 되고, 보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또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 안에 생명되신 예수가 있고, 그 예수 때문에 살고,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럼 왜 우리의 앞서간 제자들이나, 바울이 이렇게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하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왕이요,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사람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에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17에서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4:9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바로 하실 유일한 중보자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서술형으로 7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나는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요 14:6). 나는 포도나무요(요 15:1,5)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오직 예수님만이 만유의 주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는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을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되셨습니다. 특별히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에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1에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주’는 구주 즉 Savior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 즉 Lord입니다. 주인입니다. 누가복음 2:11에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라고 하며 또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 주시는 구세주일 뿐 아니라. 예수님은 만유의 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이 주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행 2:36, 4:26, 롬 14:8-9, 고후 4:5, 빌 2:11, 골 2:6. 롬 14:8). 값으로 산 우리의 소유, 주님이십니다(벧후 1:11, 3:18, 행 10:36, 요 20:28), 롬 10:9, 고전 12:3, 고후 4:5, 고전 8:6, 롬 14:5-9).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약 1:1, 2:1, 유 1:17, 21, 25) 등 로마서 1:1, 갈 1:10, 빌 1:1, 골 1:7 등등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십니다. 사도행전 10:36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6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6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아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유의 주로써 만유를 통일하고,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만유의 주가 되시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오직 예수님만이 심판주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영광스렇게 재림하십니다. 초림때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재림때에는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어떻게 오십니까? 심판주로 오십니다. 마태복음 25:31이하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시면서... 악인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우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가는 그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심판하셔서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만유의 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중보자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사실 다른 종교에서는 믿음의 대상을 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적 행위를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의 희망도, 인류의 소망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사망과 심판과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와 뿌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핵심 주제가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감추어진 그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입니다. 그런데 까딱 잘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해 놓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간에 다시금 질문을 던져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 주일날만 주인이 아니라, 일 년 365일 주인이십니까? 교회에 있을 때만 주인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주인이십니까?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만 주인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이십니까? 진지하게 자신의 하루생활을 돌아보며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매일 매일,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누구와 함께 있어도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공부하는 목적, 일하는 목적, 결혼하는 목적, 장사하는 목적, 저축하는 목적, 자녀들을 기르는 목적, 운동하는 목적, 여행하는 목적,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반복되는 일상생활의 목적이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만약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형식적인 관계는 갖고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내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이상하지 않습니다(롬 14:8).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꼭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사람을 광신주의자로 치부하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갓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허송세월 보낸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친구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거의 모태 신앙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야, 예수 믿는 것 좋은데,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아라. 교회에 너무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결국 너만 손해야, 결국 너만 상처받게 돼, 적당히 예수 믿어”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것도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던 사람이 넌 아직 신앙생활을 얼마 안 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하면서 충고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에 깊이 빠지면 훌륭한 직장인이고, 공부에 깊이 빠지면 좋은 학생이고, 운동에 깊이 빠지면 뛰어난 운동선수인데, 왜 예수님께 깊이 빠지면 이상하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세상도 예수님이고, 성공도 예수님이고, 돈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에게 미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왔던 사람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성경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형식적인 관계였는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 적이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것은 오직 예수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오직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는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슴을 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남은 생애 오직 예수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 오직 예수로 살면, 참 평안을 누립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슨은 진짜 기독교인이 되면 그 인생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이고, 세 번째가 환난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로 말면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 평안을 누립니다.
둘째, 오직 예수로 살면, 참 지혜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지혜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4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골로새서 2:3에도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살면 마지막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이지만 정말 보람 있고 의미 있고 값진 인생을 살았다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기대 속에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오직 예수로 살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의지하고 사람도 의지하고, 예수님도 바라보고 세상도 바라보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 같은 승리를 체험했던 인생들은 하나같이 오직 주님,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할지라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면, 오직 예수의 사람이 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오직 예수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오직 예수만을 사모하고, 오직 예수만을 체험하고, 오직 예수와만 동행하고, 오직 예수 닮아가고,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 2 강 오직 교회 중심
성 경 : 마태복음 16 : 18-19

교회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시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와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교회란 신앙의 어머니이며, 요람입니다. 마치 엄마 품을 떠난 갓난 아기가 살아 남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 건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고 종종 통탄할 만큼 타락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의미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이 교회는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금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외적 은혜의 방편을 마련하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교회의 품속으로 들어와 도움을 받으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모친 즉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모친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지상에서 풍족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가르ㅊㅂ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교육을 통해서만 성장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된 자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 영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교회가 중요한지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봅시다. 아니 다르게 말하면 왜 우리가 오직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수많은 교회들에 세워져 있지만, 이 교회를 예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이 세우신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고, 오직 예수만이 만유의 주라는 사실을 믿고, 오직 예수만이 심판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자신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을 통해서 지상의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우리 인간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16:18-19에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내 교회’는 우리 자신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예수님 자신이요, 예수님 자신이 세우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천국 열쇠 즉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교회 모두 예수님이 존재하시면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2:8에서 서머나 교회에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2:12에서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2:18에서 두라디라 교회에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3:1에서 사데 교회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3:7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3:14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일곱 교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에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 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자신 뒤에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고,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여기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1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을 일곱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교회에게 편지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에,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대단히 중요하며, 우리는 오직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가 나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럼 왜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근거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고전 10:32, 11:22, 15:9, 고후 1:1 갈 1:13, 살전 2:14, 딤전 3:5, 3:15).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씀이 대충 아홉 번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불러 모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보이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3에서 사울이 ‘교회를’ 잔멸 할새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2에서 사울이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교회’입니다. 사울은 실제로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이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합니다. 사울을 예수를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실제로 박해한 것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나를’이라고 하면서 교회가 예수님 자신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보이는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시고”고 합니다. ‘내가 네게 천국열쇠를 주리니’라고 합니다. 천국열쇠(=복음)를 베드로를 통해 교회에다 맡기셨습니다(계 1:18, 3:7).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엄청난 특권들입니다.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 못 들어 가느냐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형제 범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문제입니다. 땅에서 교회와의 관계가 바로 하늘에서 교회와의 관계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2.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할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럼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할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관계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입니다(출 6:7, 15:13, 16, 19:5, 레 26:12, 갈 6:16, 벧전 2:9). 바울은 신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하여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로마서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둘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고전 12:27, 엡 1:23, 4:12, 골 1:18).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 동안에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활동하신 것과 똑같이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한편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모임인 교회와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합니다. 구원의 전과정은 대부분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골 1:18)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5).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모두 유일하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로 모일 것입니다.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그와 연합된 신자들은 머리이신 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라가게 됩니다(골 2:19).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자신이 그 가지인 신자들과 결합되었음 말씀합니다(요 15:1-11).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는 또한 교회를 다스립니다(골 2:9-10).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 상호간의 연결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2:12, 13, 14:4-5, 12).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필요로 하며, 또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의 필요가 됩니다. 에베소서 4:11-16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셋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입니다(고전 3:16-17, 엡 2:22, 고전 12:12-13). 교회를 처음 존재케 하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행하신 극적인 이 사건은 오순절에 일어났는데, 그 때 그는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시고, 삼천명을 회개시키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이후 성령님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지금 성령께서는 교회에 내주하고 계신데, 신자 한 살마 한 사람 안에 개별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안에 공동으로 내주해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계속해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밖에 신자들이 ‘주 안에서 성전’(엡 2:21)이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엡 2:22)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성전의 모퉁이 돌로 묘사하고 있는 문맥에서 베드로도 신자들을 신령한 집이라고 합니다(벧전 2:5). 이렇게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거하시면서 교회에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의 본성과 동일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갈 5:22-23). 교회에 이러한 특질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교회 안에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에 능력을 전달해 줍니다(행 1:8, 요 14:12, 16:7-8).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에게 모든 가르침들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 16:13). 특별히 성령님은 예수를 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3.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해 말씀하는 것을 살펴 봅시다. 골로새서 1:24-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합니다.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은 첫째, 오직 교회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교회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파하며입니다. ‘그를 전파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의 삶 속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전파고 있습니다. 지속적 상태, 습관적인 행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권하고입니다. 이러한 전파의 삶이 권면으로 나타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교훈에 대한 실천을 점검하고 충고한다는 것입니다. 권면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직접적 교정 및 책망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셋째, 가르침입니다. 전파의 구체적인 삶이 권면과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실제적인 가르침입니다. 추상적인 교리보다는 목회 윤리적인 면에서 실생활에 필요한 규범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2:46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합니다. 또 히브리서 10:25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는 ‘카알’(lh;q)로서의 교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에다’(hd:[e)로서의 교회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는 ‘에클레시아’’(ejkklhsiva)로서의 교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쉬나고게’(sunagwgh)로서의 교회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전투하는 교회는 죄와 악에 투쟁하면서 싸우는 교회입니다. 승리하는 교회는 모든 싸움을 마치고 승리한 교회입니다. 이것을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로 나눕니다.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라고 합니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입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다양한 성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敎會)이어야 하고, 교회(交會)이어야 합니다. 사귈교, 모을회로써 교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르칠교, 모을회로서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의 상호간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몸으로서의 교회의 특징은 진정한 교제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상호관련성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긴밀한 교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통일된 몸이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종교적으로 어떤 지도자를 따르느냐는 문제로 분쟁했을 때(고전 1:10-17, 3:1-9)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고전 12:12-13).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처럼 유기적인 생명적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엡 5:23, 골 1:18, 2:19). 이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교회는 교제하는 공동체 즉 교회(交會)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과 그 제자들이 즉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증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사귐 즉 교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귐 즉 교제라는 말은 코이노니아(koinwniva)인데, 이 말은 공통된 것을 함께 소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공통된 것을 함께 소유할 때 서로에게 사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낚시라는 공통된 취미를 함께 소유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낚시 동호회가 생기고, 바둑이라는 공통된 취미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바둑 동우회가 생깁니다. 낚시라는 공통된 취미, 바둑이라는 공통된 취미를 함께 소유할 때 그 사람들이 사이에 사귐이 생깁니다. 그러나 낚시가 없으면 낚시 동우회가 깨어지고, 바둑이 없으면 바둑 동호회가 깨어집니다. 그렇다면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무엇을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사귀기를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없는 성도의 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만 아니라, 아들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마 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신앙적 교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 요한은 우리와 너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교회를 교회(敎會)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교회’(交會)가 아닌 교회(敎會)라고 번역되었습니다. 1887년 간, 로스 역, 예수셩교젼서에서부터 ‘교회’라는 용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어성경의 번역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지체로서의 다른 성도들 간의 교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교회(交會)가 되어야합니다. 이점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원 1세기의 그레꼬 로마 사회, 특히 그 시대의 종교적 현실에서 본다면 교회(敎會)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 당시의 종교는 다양했습니다. 신당이나 신전에서 의식을 행하고 제물을 바쳤던 점에서 공통된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식이 주된 종교행위였으며, 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상(像)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론이나 가르침, 혹은 교훈이나 권면이 없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제의적 종교의식의 반복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이와는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어떤 형식의 상(像)이 없었고, 신전이나 제전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철학파들처럼 함께 모여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가르침의 공동체였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책 즉 두루마리의 종교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가죽종이에 쓴 것’(딤후 4:13)이 있었고, 후에는 바울의 서신과 같은 책 즉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정집에 모였고,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토론했습니다. 당시 헬라-로마의 종교에는 권면이나, 설복이나 토론, 곧 논쟁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교훈하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철학파와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설교 즉 가르침은 신앙행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것을 통해 당시의 관습과 의식적 전통을 답습하는 종교들과는 달리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거기에는 변화와 쇄신이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이렇게 볼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신앙의 공동체의 회중을 가르침이 있는 모임인 교회(敎會)라고 명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42에 보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합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은 오해하기 딱 좋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하는 데만 전혀 힘쓴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힘쓴다’는 말이 맨 앞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전혀 힘쓴다’는 말은 기도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가지 항목도 다 함께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에 힘을 썼고, 서로 교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떡을 떼는 일에 힘을 썼고, 기도하는 데도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 ‘전혀 힘을 썼다’는 말은 1:14에도 동일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합니다. 여기 이 말은 어떠한 일에 대한 충성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착성, 인내성, 계속성, 지속성, 간절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는 한번만 힘쓰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만 열심히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념하면서 힘있게 집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서로 서로 힘을 썼습니다. 그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을 위해 전혀 힘쓰고 노력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카이’가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그 교제하며, 그 떡을 떼고 그리고 그 기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네 가지 특성을 살펴봅시다. 첫째,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입니다. 둘째, 성령의 교제가 중심인 교회입니다. 셋째, 은혜의 나눔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넷째,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한 마디로 십자가 생활입니다. 가르침 즉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교제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바로 수직과 수평의 십자가입니다. 또 떡을 떼는 것은 나눔입니다. 인간과의 은혜와 풍성한 식탁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바로 수직과 수평의 또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은 바로 십자가의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회 중심이란 십자가 중심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잘 하여 받아 누리는 축복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계시록 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제 3 강 오직 말씀 중심
성 경 : 디모데후서 3:14-17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셨고, 주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말씀 즉 성경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을 가장 존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있습니다. 장로교에서 임직식을 거행할 때 그것이 목사이든지, 장로이든지, 집사이든지, 권사이든지 상관이 없이 제일 먼저 임직자들에게 “구약과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본 장로회 교리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 교리 문답과 소 교리 문답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오직 말씀, 오직 성경입니다. 바로 이 말씀 즉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냐, 거짓 교회냐 표지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올바른 말씀 전파입니다. 둘째는 올바른 성례입니다. 셋째는 올바른 치리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교회입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찌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고자하는 자는 오직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람마’(gravmma)입니다(딤후 3:15). ‘그라페’(grafh)입니다(딤후 3:16).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성경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쓰여진 말씀입니다.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내야 할 말씀입니다. 해석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둘째, ‘로고스’(lovgo")입니다(벧후 3:5, 딤후 4:2).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말씀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드러난 말씀입니다. 선포되고, 전파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셋째, ‘레마’(rJh'ma)입니다(벧후 3:2).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말씀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해서 심기워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복수를 사용해서 설교나 교훈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말씀입니다. 믿어진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내 속에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13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Kai; dia; tou'to kai; hJmei'" eujcaristou'men tw'/ qew'/ ajdialeivptw", o{ti paralabovnte" lovgon ajkoh'" par j hJmw'n tou' qeou' ejdevxasqe ouj lovgon ajnqrwvpwn ajlla; kaqwv" ajlhqw'", ejstin lovgon qeou', o}" kai; ejnergei'tai ejn uJmi'n toi'" pisteuvousin.)고 합니다. 말씀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1:6에서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kai; uJmei'" mimhtai; hJmw'n ejgenhvqhte kai; tou' kurivou, dexavmenoi to;n lovgon ejn qlivyei pollh'/ meta; cara'" pneuvmato" aJgivou,)라고 합니다. 말씀은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게 합니다. 이와같은 놀라운 말씀이기 때문에 오직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은 결국 오직 교회 중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또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 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자신 뒤에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고,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여기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1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을 일곱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교회에게 편지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에,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디모데에게, 디도에게,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곧 오직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직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왜 오직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오직 말씀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16을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pa'sa grafh; qeovpneusto" kai; wjfevlimo" pro;" didaskalivan)라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모두는 전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그 모두가 유익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의 경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로 되어 있지 않는 단순한 서술이나 진술 구문도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로 되어 있지 않는 단순한 서술이나 진술 구문도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 전체 영감성과 성경 무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스스로가 말하는 성경의 자기주장이며, 성경의 권위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각 성경은 또한 유익하다”(Eery scripture inspired of God is also profitable-ASV)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를 서술적 형용사가 아닌 한정적 형용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권위를 형편없이 무너뜨리는 해석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지 않는 책, 혹은 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영감성과 성경 무오성을 부인하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라서서 성경을 유한한 인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대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라는 형용사가 한정적 용법이 아닌 서술적 용법으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든 성경”(pa'sa grafh;)은 3:15의 ‘성경’(ta; iJera; gravmmata)과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차이가 있는가? 다시 말하면 여기서 언급된 ‘모든 성경’의 범주에는 구약 성경만이 포함되는가? 아니면 다른 문서들 즉 신약 성경 역시 포함되는가? 여기에 대해 핸드릭슨(W. Hendriksen)은 모든 성경의 범주에 “교회 안에서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된 모든 성경”이 포함됨을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가 “모든 성경”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구약 성경 39권이 정경이 된 것은 A.D. 90년 경 얌니아 종교회의 결정에 의해서이고, 신약 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인정받은 것은 A.D. 397년경 카르다고 회의에 의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아 정경이 된 것은 단순히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자체로 성도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정경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정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번역된 ‘데오프뉴스토스’ (qeovpneusto")는 ‘하나님’을 뜻하는 명사 ‘데오스’(qeov")와 ‘바람이 불다’, ‘호흡하다’라는 뜻의 동사 ‘프네오’(pnevw)의 파생어의 합성어에서 유래햇습니다.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오늘 본문 이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된 것과 같이 성경 역시 하나님의 호흡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숨이란 하나님의 영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가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으로 성경의 신적 저작설 곧 성경 영감설의 결정적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 전체는 완전한 지혜를 가지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영감을 통해 지으신 것이 확실하므로 결코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인간의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법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임의로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잘못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2. 오직 말씀 즉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 본문 3:15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읽은 자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성경은 철학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정치학의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고, 영생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구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삼일만에 다시 부활 하셨다는 사실도!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사실도 성경을 통하여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해 줍니다. 따라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부터 알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3:15에서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어려서 부터’입니다. 어린아이, 태중에 있는 아디, 젖먹이, 유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디모데가 매우 어릴적부터 성경을 가르친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5에서 이미 바울은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어려서부터’라는 어구는 문맥상 디모데가 성경을 알기 시작한 특정한 시기를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생애 속에서 성경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아야, 성경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오직 말씀 즉 성경은 삶의 표준이 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규범입니다.
오늘 본문 3:16-17을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헬라어로 “그람마”(gravmma) 라고 합니다(3:16). 이때는 문자, 글자, 문서를 의미합니다. 명사 그람마(gravmma)는 그라포(gravfw)에서 유래했으며, 그라페(grafh)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동의어입니다. “그람마”(gravmma)와 “ 그라페”(grafh)는 본래 “새기거나 조각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다음에 “기록된 것”이라는 넓은 의미를 지게된 것입니다. 또 성경을 헬라어 “히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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